마터호른을 향한 첫걸음 체르마트에서 시작된 알프스의 아침

마터호른을 향한 첫걸음
체르마트에서 시작된 알프스의 아침

Heading Toward the Matterhorn
A Morning Begins in Zermatt

긴 겨울밤을 지나 마침내 마터호른을 향해 달려가던 아침. 체르마트는 알프스를 만나기 전, 가장 설레는 기다림을 우리에게 선물했다.


새벽이 열어 준 하루

어둠 속에서 말똥말똥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생각의 숲을 헤매다 보니 어느새 창밖으로 희미한 새벽빛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긴 밤이 끝나고 드디어 기다리던 아침이 찾아왔다.

간단히 아침 식사를 마친 우리는 체르마트(Zermatt)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밖의 공기는 차갑게 얼굴을 스쳤고, 역사 안에는 스위스의 겨울 아침 특유의 맑고 서늘한 공기가 가득했다.

급하게 모자를 하나 살까 하여 역 안 상점들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가격은 예상보다 훨씬 높았고, 마음에 드는 모자도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빈손으로 기차에 올랐다.

언니는 호텔에서 마신 커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며 역사에서 3프랑을 주고 따뜻한 커피를 한 잔 사 왔다. 그 작은 종이컵 하나가 추운 아침을 조금은 따뜻하게 만들어 주었다.

스키가 일상이 되는 사람들

체르마트행 열차 안은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겨울 스키 시즌이라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스키복을 입고 스키 장비를 들고 있었다.

관광객이라기보다 생활인들의 모습이었다. 누군가는 출근하듯 자연스럽게 스키를 메고 열차에 올랐고, 누군가는 아이의 장비를 챙기며 익숙하게 자리를 잡았다.

가이드는 이 지역에서는 스키가 취미가 아니라 생활이라고 설명했다. 험준한 산악지형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누구나 스키를 탈 줄 알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문득 어린 시절 읽었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떠올랐다. 책 속에서만 존재하던 알프스가 아니라, 사람들이 오늘도 삶을 이어가는 진짜 알프스가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자동차가 없는 마을, 체르마트

테쉬에서 약 10여 분을 달리자 체르마트 역에 도착했다. 역 광장으로 나오자 작은 전기택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이곳은 아름다운 자연환경을 지키기 위해 일반 자동차의 출입을 제한하는 마을이다. 조용한 전기차만이 골목을 오가며 사람들을 실어 나른다. 덕분에 마을에는 자동차 소음 대신 사람들의 발걸음과 종소리, 그리고 겨울 바람 소리만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다.

알프스 산맥에 포근히 안긴 체르마트는 아직 완전히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조용했다. 붉은 지붕과 오래된 목조 건물들이 눈 덮인 산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처럼 다가왔다.

우리는 오후에 고르너그라트 등반열차를 타기로 되어 있었기에 오전 시간을 이용해 체르마트 골목골목을 천천히 걸었다.

작지만 아름다운 마을

체르마트는 크지 않은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오랜 역사와 현대적인 편의시설이 자연스럽게 공존하고 있었다.

마을 끝에 있는 작은 성당에 올라 바라본 마터호른은 아직도 멀리 있었지만 이미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존재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골목마다 걸음을 멈추며 사진을 찍고, 작은 상점들을 구경하며 천천히 시간을 보냈다. 자유시간이 주어지자 우리는 스위스 마트인 쿱(COOP)에도 들렀다.

그뤼에르에서 샀던 치즈와 똑같은 제품이 훨씬 저렴한 가격에 진열되어 있었다. 몇 개 더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여행 마지막까지 들고 다닐 짐을 생각하니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결국 알프스 정상에서 먹을 초콜릿만 몇 개 골라 장바구니에 담았다.

점심으로 나온 닭다리 구이와 따뜻한 야채, 그리고 녹인 치즈는 예상보다 훨씬 든든했다. 정통 퐁듀는 아니었지만 치즈에 야채를 찍어 먹으며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채울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시간이 찾아왔다. 우리 앞에는 고르너그라트 등반열차가 조용히 출발을 기다리고 있었다.

드디어 알프스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순간이었다.

알프스가 열리는 순간

등반열차는 천천히 체르마트를 떠났다. 창밖으로 보이던 작은 마을은 조금씩 멀어지고, 열차는 하얀 눈으로 덮인 알프스의 품속으로 조용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높이를 더할수록 풍경은 조금씩 달라졌다. 나무 사이로 보이던 설경은 어느새 끝없이 펼쳐진 은빛 세상이 되었고, 산과 하늘의 경계마저 희미해질 만큼 눈부신 풍경이 이어졌다. 열차 안 여기저기에서는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누군가는 창문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사진을 찍었고, 누군가는 아무 말 없이 그 풍경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러던 어느 순간, 멀리서 하나의 봉우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마터호른(Matterhorn)이었다.

그 이름 하나만으로도 수많은 여행자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산. 마터호른은 한 시간 가까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열차가 굽이굽이 산길을 오를 때마다 어느 순간은 가까워지고, 어느 순간은 산 뒤로 숨어 버렸다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알프스가 조금씩 자신을 보여 주며 우리를 정상으로 초대하는 듯했다.

관광객의 열차, 주민들의 삶

등반열차는 중간중간 작은 산골 마을에 멈춰 섰다. 창밖을 바라보니 깊은 계곡과 가파른 산비탈 사이에도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떻게 저런 곳에서도 사람이 살아갈 수 있을까.'

처음에는 그저 신기하게 바라보았지만, 역에 도착할 때마다 열차에서 내리는 사람들을 보며 생각이 달라졌다. 그들은 관광객이 아니었다. 이 산골 마을에서 살아가는 주민들이었다.

역을 나선 사람들은 넓은 도로도 없는 산허리의 좁은 오솔길을 따라 집으로 걸어 내려갔다. 눈 덮인 비탈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걸어가는 모습은 이곳에서는 너무도 평범한 일상이었다.

그제야 아침 기차 안에서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모두 스키복을 입고 있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이곳에서 스키는 겨울 스포츠가 아니라 생활이었다. 눈이 내리면 그것이 곧 길이 되었고, 스키는 가장 익숙한 교통수단이 되었다.

우리에게는 평생 한 번 탈까 말까 한 관광열차였지만, 그들에게 이 열차는 학교로 가는 길이었고, 직장으로 향하는 길이었으며, 가족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다. 삶을 이어 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절약이라는 삶의 방식

문득 테쉬 호텔에서 만났던 주인장 할아버지가 떠올랐다. 아침 식사 때 커피를 한 잔씩만 따라 주시던 모습이 처음에는 조금 인색하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높은 산속까지 모든 물자를 운반해야 하는 환경. 눈과 추위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자연스럽게 절약이 몸에 배었을 것이다. 그것은 인색함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살아가기 위한 오래된 생활의 지혜였다.

우리가 여행에서 스쳐 지나가는 풍경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누군가에게는 평생을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알프스는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감동

열차는 마지막 구간을 향해 힘차게 올라갔다. 창밖에는 끝도 없이 이어지는 설산이 펼쳐졌고, 계곡 사이사이에는 작은 마을들이 장난감처럼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언제나 마터호른이 있었다. 잠시 모습을 감추었다가 다시 나타나며, 묵묵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니 자연스레 어린 시절 읽었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가 떠올랐다. 산등성이 어디쯤에서 하이디와 피터가 양들을 몰고 달려올 것만 같았다.

동화 속에서만 존재한다고 생각했던 풍경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우리 모두는 잠시 어린 시절의 마음으로 돌아갔다.

마침내 열차는 고르너그라트 정상역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고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스쳐 지나갔다.

이제 우리는 알프스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평생 잊지 못할 마터호른과의 첫 만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터호른 앞에서 멈춘 시간

등반열차에서 내리는 순간 우리는 모두 말을 잃었다.

눈앞에는 끝없이 이어지는 알프스의 설산이 펼쳐져 있었고, 그 한가운데에는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운 자태로 마터호른이 우뚝 서 있었다. 수없이 사진으로 보았던 풍경이었다. 그러나 실제로 마주한 마터호른은 사진 속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차가운 공기는 폐 깊숙이 스며들 만큼 맑았고, 눈 덮인 산맥은 햇빛을 받아 눈부시게 빛났다. 그 풍경 앞에서는 누구도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자연이 들려주는 침묵이 우리 모두를 조용히 바라보게 만들었다.

가이드는 웃으며 말했다.

"이번 여행팀은 모두 삼대는 덕을 쌓고 오신 것 같습니다."

그는 이곳을 여러 번 안내했지만 이렇게 선명한 마터호른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했다. 불과 며칠 전 팀은 날씨가 좋지 않아 산에 오르지도 못했고, 체르마트역에서 흐릿한 마터호른을 배경으로 사진만 찍은 채 돌아갔다고 했다.

겨울의 스위스는 원래 눈과 비가 잦고 흐린 날이 많다. 특히 2월은 변화가 심한 계절이라 맑은 하늘을 만나기가 쉽지 않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의 여행은 달랐다. 공항에 도착한 첫날 밤 잠시 비가 내린 것을 제외하면 여행 내내 푸른 하늘이 이어졌다. 알프스도, 마터호른도, 호수도 모두 가장 아름다운 얼굴을 보여 주었다.

가이드는 웃으며 말을 고쳤다.

"아니, 삼대가 아니라 사대는 덕을 쌓으신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웃었지만 마음속으로는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눈앞의 풍경은 정말 감사한 선물이었다.

하나님의 창조 앞에서

정상 전망대에서 바라본 알프스는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었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맥과 새하얀 설원, 그리고 그 중심에서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마터호른.

그 거대한 자연 앞에 서 있으니 평소에는 크게만 보였던 나의 걱정과 욕심이 너무도 작게 느껴졌다.

'이 대자연을 말씀으로 창조하신 하나님.'

그 생각 하나만으로도 마음은 한없이 평안해졌다. 늘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바쁘게 달려왔던 시간들, 아등바등 살아가며 움켜쥐려 했던 것들이 잠시 내려놓아졌다.

알프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사람을 쉬게 하는 힘이 있었다. 산은 우리에게 쉼을 주었고, 하늘은 우리의 마음을 넓혀 주었다.

그곳에서 나는 무언가를 결심하려 하지 않았다. 앞으로 무엇을 하며 살아갈지 계획을 세우려 하지도 않았다. 그저 지금 이 순간을 감사하며 자연이 허락한 평안을 온전히 누리고 싶었다.

커피 한 잔의 여유

전망대 카페 창가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창밖에는 여전히 마터호른이 변함없는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커피는 아마 여행 중 가장 값비싼 한 잔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순간만큼은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낯선 나라에서,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알프스를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 한 잔. 그 여유는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가끔은 우리가 살던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전혀 다른 세상에 자신을 맡겨 보는 일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시간은 삶을 바꾸는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다시 살아갈 힘을 조용히 채워 주는 쉼이었다.

우리 모두는 하이디가 되었다

이번 여행에 함께한 사람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다.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보기 위해 온 것이 아니라, 오직 알프스를 만나기 위해 스위스를 선택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여행 내내 누구 하나 큰소리를 내는 사람이 없었다. 버스 좌석도 첫날 앉은 자리를 끝까지 지킬 만큼 서로를 배려했고, 작은 불편도 웃으며 넘겼다.

언제나 일행을 먼저 살피던 프린세스 가족, 순천에서 온 오누이 대학생, 울산에서 온 어머니와 딸, 일산에서 온 시흥이네 가족…. 서로 다른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었지만 알프스 앞에서는 모두 같은 마음이 되었다.

눈을 뭉쳐 던지며 웃고, 눈밭에 몸을 던져 아이처럼 즐거워하고, 서로 사진을 찍어 주며 행복해하던 모습. 그 순간만큼은 나이도 직업도 삶의 무게도 모두 내려놓았다.

우리 모두는 잠시 어린 시절의 하이디가 되어 있었다.

석양빛을 받아 더욱 붉게 빛나던 마터호른은 마지막까지 묵묵히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은 흘러가고 있었지만 알프스는 마치 그 순간만은 영원히 멈춰 있는 듯했다.

지금도 그날을 떠올리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거대한 산이 아니다. 그 산 아래에서 작아졌던 나 자신, 그리고 그 작은 존재를 따뜻하게 품어 주던 알프스의 품이다.

그래서 여행은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풍경 속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마터호른은 지금도 내 마음속에서 가장 아름다운 겨울의 노래로 조용히 남아 있다.


From the Author

알프스는 높은 산을 보여 준 여행이 아니라, 삶을 천천히 바라보는 법을 가르쳐 준 여행이었습니다. 마터호른 앞에서 느꼈던 경외감과 평안은 시간이 흘러도 제 마음속에서 변하지 않는 풍경으로 남아 있습니다.

Book Quote

"여행은 세상을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이 조금 더 넓어지는 일이다."

📍Next Story

다음 이야기에서는 스위스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루체른, 호수 위에 머문 시간을 함께 걸어갑니다. 카펠교와 루체른 호수, 그리고 여행의 끝에서 만난 가장 따뜻한 풍경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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